무사하다고 다행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다행이라고 모두가 무사한 것은 아니니까요.
우리 지역에 큰 산불이나 우리나라 최대 최악의 산불이라고 연일 뉴스에서 보도하고 있고, 열흘 가까이 여전히 잔불이 남아 있어 마음 졸이고 있습니다.
염려돼 전화 주신 분들께, 다행히 우리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이웃의 엄청난 피해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나는 괜찮다는 말이 다행이라는 그 말이 얼마나 죄스럽고 미안한지, 아들딸이 안부 전화를 해도 ‘우리는 괜찮아 염려하지 말아라’ 피해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고받는 전화이지만 혹시라도 나의 말이 들려 상처가 될까 낮은 목소리로 말해 안심시켜 놓고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우리 가족이 기쁜 일이 있을 때 축복받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찾아가 위로받던, 우리 가족이 기도 다니던 절집 ‘운람사’를 이번 산불로 잃어버렸고, 대학 시절에 불교 동아리 활동을 같이 했던 절친이 출가를 해, 이제는 큰스님이 되시고 큰절 주지로 계시는 고운사를 이번 화마로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불길에 무너져 기왓장과 잔해만 남은 절집을 찾아가 스님을 뵙고 평소 하던 합장 인사 대신에 “스님, 제가 안아봐도 될까요?” 그렇게 말씀드리고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치지 못한 채 스님을 안아드렸는데, 괜찮다고 다행히 부처님께 당장 기도할 법당 하나 남아 있고 잠자고 묵을 방 하나는 남아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우리 부부를 위로하더군요.
가족의 평안을 기도하던 운람사 ‘보광전’과 딱 한 사람 정도 앉아 기도할 수 있는, 세상에 이렇게 작고 귀여운 산신각이 있을까 했던 산신각, 스님과 마주 앉아 차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부속 건물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학 시절 동아리 수련회 했던,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며 참선하고 토론했던 고운사의 ‘우화루’ ‘가운루’ 누각에는 수 백년의 역사와 수많은 사람의 흔적이 담겼을 테고, 아내와 첫 만남의 시간과 우리 가족의 추억의 장소가 이제 기억 속에서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복원하면 된다고 그렇게 스스로 위안해 보지만 그 속에 깃든 역사와 오랜 세월의 흔적은 그 무엇으로도 되찾을 수가 없으니까요.
불길이 지나간 절집을 다녀오며, 화마를 피하지 못한 마을을 지나며 마치 나의 잘못인 듯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그저 침묵하며 마음속으로 빨리 회복하시길 기도하며 지나왔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의 고향인 이 지역에, 아들과 딸 부부가 산불 피해 성금을 보냈다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고 미안해하며 전화를 해, 잘했다고 고맙다고,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고 서로 안부를 전하고 위로했습니다.
화마가 지나가 검게 불타버린 마을에 속절없이 매화가 피어있고 무너진 담벼락에 여전히 샛노란 개나리가 미안해하며, 부디 다시 회복하시길 바라듯이 봄꽃이 폈습니다.
매화가 피었고 올 벚꽃이 드문드문 피기 시작했습니다.
불길 속에 남은 진달래가 몹시도 춥던 지난 겨울을 이겨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밖에 없다는 듯 미안해 하며 여리게 꽃을 피워줬습니다.
그래야지요.
봄이 오면 당연히 다시 꽃이 피듯이, 매서운 겨울 지나면 더 붉게 피는 진달래처럼, 겨울을 견뎌야 비로소 피는 매화처럼 그렇게 다시 꽃을 피워야지요.
2025년 4월 2일. 박영오 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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