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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옛 추억 속에 머물다

산수화 화첩기행

by 더불어 숲 2017. 5. 25.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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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청량사를 찾아가다 - 박영오 (2014 여름)





여름을 재촉하는 늦은 봄비가 내립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가 이 저녁까지 하루 종일 그치지 않고, 마치 장맛비처럼 소리 내어 내립니다.
고개만 돌리면 창밖으로 비오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오늘은 자주 창밖 먼산을 바라보게 되네요.

이 흐린 날 누군가 우산을 쓰고 찾아줄 듯하고, 멀리 있는 옛 친구가 비에 젖은 목소리로 전화해줄 듯 하고, 빗물 뚝뚝 떨어지는 우의를 쓰고 달려온 집배원의 우편물 뭉치 속에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가 있을 듯해 자주 창가로 눈이 갑니다.
창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아 아예 우산을 쓰고 비 마중을 나갔습니다.
후두둑 후두둑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도 좋고, 바짓가랑이를 축축하게 적시는 빗물도 그리 나쁘지 않고, 옷 속으로 스며드는 냉기마저도 싫지 않는, 비 내리는 날 중년의 남자가 추억에 젖어 일없이 밖을 서성거립니다.

초록의 나뭇잎에 봄비가 방울방울 맺혀있고 이제 겨우 피기 시작한 들꽃은 물기에 젖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나뭇가지에 맺혀진 빗방울마다 추억 하나씩은 될 듯, 이미 마음은 먼 과거 어느 곳에 머물며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오는 날은, 이렇게 조용히 비가 내리는 날은 가까이에서 그런 나를 지켜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해집니다.

그렇게 소중한 추억도 세월 따라 잊혀지는 가 봅니다.
비오는 날이면 불치병처럼 으레 생각났던, 오랫동안 과거에 머물게 했던 추억들이 하나 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리고 이제 겨우 몇 사람만 남아 내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기억과 추억 속에서도 만남과 헤어짐은 있는가봅니다.
한때는 잊으려 잊으려고 해도 기억 속에서 떠나가지 않더니, 이제는 슬며시 제 알아서 사라져버리네요.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더니, 버리려고 애썼던 아픈 기억도 막상 잊혀져가니 아쉬워집니다.
그래도 잊어지지 않는 상처 깊었던 추억 하나는 떠나지 않고 늘 내 곁에 머물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서 그것마저도 점점 옅어지더니 새로운 추억이 그 빈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네요.
세월에 이기는 장사 없다더니 아픔도 추억도 그러한가봅니다.

굳이 잡지 않고, 애써 보내지 않아도 제 알아서 오고가는 계절처럼, 추억과 아픔도 제 알아서 오고 가는가 봅니다.
그래도 봄비 내리는 오늘은, 먼 옛 추억에 머물며 희미해져가는 옛 사람을, 기억 속에 마저도 떠나가려는 옛 사람을 다시 돌이켜 잡아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 봄비가 그치고 날 맑아지면 내 마음 다시 돌아오니, 내가 잠시 옛 추억에 머물고 있더라도 염려하지 마시고 가만히 지켜봐주시길.......



(글 그림 박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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