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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화실 어딘가에는 블랙홀이 있습니다.

편지 보냈습니다

by 더불어 숲 2019. 5. 2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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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화실에서는 별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됩니다.
엊그제는 오랜만에 비가 내려 하루종일 넋을 놓고 바라보게 하더니, 어제 오늘은( 5월 21일, 음력 열이레) 달빛이 너무 고와 늦은 시간까지 창밖을 바라보게 되네요.
모든 불빛을 끄고 창밖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처럼 인증샷을 찍고 부산을 떱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달빛이 아까워 자주 사진을 찍어 체면 불구, 주책 덩어리라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지만 늦은 시간에 오두막 화실에서 찍은 달빛사진을 보냅니다.
이 시간이면 피곤에 지쳐있을 아들 딸에게 카톡카톡 그러면서 보내고, 잠들어 있거나 아니면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있을 초등 동창들에게 보내고, 왜 이런 것을 이 시간에 보내지 의아해할 동호회 회원들에게 보내고 나름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달빛과 지금의 달빛이 다른데, 지금 이 순간의 달을 다시 찍어 보낼까?
자세히 보면 다르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 사진이나 이 사진이나 매 한가진인데 아들 딸에게 다시 보냅니다.
카톡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우리 아빠가 할일이 없어 혼자 신났구나 하고 있는가 봅니다.
아들 딸의 침묵에 이 시간에 병원에서 야근하고 있는 아내가 무반응이 미안했던지 '아빠가 달빛이 아까워 아들 딸에게 달사진을 보냈네 ' 단체 카톡을 합니다.
친구들 반응은 시쿤둥하고 동호회 반응은 전무합니다.
침묵으로 '배가 불렀구나 혼자 달놀이 하고 있네' 의사 표현을 보내고 있겠지요.
카톡카톡 하는 순간 이미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다들 바쁘거나 피곤해서 쉬는 시간인데, 철없는 늙은이가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늦은 시간에 카톡거렸습니다.
내가 그러거든요. 늦은 시간에 단체방 카톡이 울리면 이 시간에 뭐하는거야 궁시렁거리며 확인하거나 무시하거나 그러거든요.
글 몇줄 썼는데 달은 이미 중천입니다.
오직 연못에 개구리 소리와 가끔 밤에 우는 산새가 울거나 하는, 지극히 고요한 산속 오두막 화실 마당을 서성거립니다.
할일 없이 달을 올려다보고 아직 달을 품고 있는 호수를 내려다 보고 그럽니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일단은 저장해두고, 마당가에 나가 달을 바라보고 오겠습니다.
........
여전히 달은 홀로 가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점점 작아지는 하현달입니다.
벌써 오른쪽 한귀퉁이가 줄어들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매 순간 변하는 세상의 이치를, 그러면서 다시 반복되는 인간의 일을 알려주는 듯합니다.
우리집 불빛 이외는 인공적인 불빛이 전혀없는 산속 오두막 화실 마당가 벤치에 한참을 앉아 달을 멀거니 올려다봅니다.
이 달빛이라면 혼자라도 좋고 마음을 나눌 친구라도 좋고 다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혼자가 아니네요.
한참 떨어진 이웃집의 개가 찾아와 우리집 마당에서 달을 바라보고 있네요.
이웃집 백구도 혼자 달을 바라보는 것이 외로웠던가 봅니다.
낮에는 자주 찾아와 친구해주었는데, 오늘은 이 깊은 밤에 찾아왔네요.
그놈도 달빛따라 왔는가 봅니다.
백구 이 놈이 측은한 듯 눈으로 나를 쳐다 봅니다.
나는 너가 측은한데, 서로 동병상련 이지요.
옛 생각도 나고 소주 한 잔도 생각나고 밤참으로 라면 생각도 나고 달달한 믹스 커피 한잔도 생각나고 보고 싶은 사람도 생각나고 그런 야심한 달밤입니다.
뭐 그리 바쁜 일이 있겠습니까?
알고보면 다 다음날 해도 급하지 않은 일이고 누가 나무라는 사람도 없는데요.
오늘은 오두막 화실 구석에 감춰둔 소주 한잔 혼자 기울이면서 달이나 실컷 보겠습니다.
오늘은 달빛이 시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습니다.
오두막 화실에서는 별것도 아닌 것이 시간을 잡아 먹습니다.
오두막 화실을 찾는 모든 분들 조심하세요.
시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어딘가에 숨어있습니다.


글 사진 박영오 (2019.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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