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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선물 잘 받았습니다

한 줄 오두막 편지

by 더불어 숲 2024. 10. 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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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화실에 가을꽃이 자라고 있습니다

 

스페인 여행지에서 만난 풍경

 

 

열흘 남짓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오니 마당에도 백일홍 꽃밭에도 꽃밭마다 잡초가 가득 자라 있습니다..

잡초가 몸짓을 크게 키우던 전에 와는 달리 이번에는 씨앗을 맺었거나 마저 씨앗을 맺으려고 잡초마다 꽃대를 길게 올렸더군요.

생존과 번식이 모든 생명체의 1차적 목표이자 본능이기에, 어떻게 하든지 생존하여 씨앗을 맺으려는 몸짓, 그게 잡초를 포함한 모든 식물들의 삶의 완성이니까요.

이 잡초가 다른 곳에서 자랐다면 방해 없이 잘 자랐을 텐데, 잡초를 뽑으며 괜히 미안해집니다..

인간만이 생존을 넘어서, 왜 사느냐? 나는 누구인가? 잡초와 꽃의 구별은 뭘까? 그런 원초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동물이니까요.

 

오전 내내 잡초 정리하고 이것저것 둘러보고 나니 땀이 비 오는 듯합니다.

땀에 절어있는 옷을 벗어서 양동이에 물을 받아 세재 없이 대충 땀기만 헹궈 빨랫줄에 널어 말렸습니다.

지하수 찬물로 샤워하며 땀을 씻은 후에 별다른 반찬 없이 풋고추 몇 개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 맛을 말해서 뭐 하리오, 가장 맛있은 식사는 노동 후에 배고플 때 먹는 밥이니까요.

선풍기 돌려 길게 낮잠 자고 일어나 마당에 그늘이 내려오면 널어놓은 작업복 챙겨 입고 오후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그래 가을이 문턱에서 기웃기웃거리고 있습니다.

본래 잡초 자라던 곳에 꽃을 심어놓고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만 나무라고 있습니다.

어쩌냐, 인간이 그런 동물인걸,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그때그때 변신하는 영악한 동물인걸.

 

어라, 오후 작업 시작할 무렵부터 참으로 오랜만에 비가 내립니다.

천둥 치며 비바람이 몰아치며 초가을 불볕더위를 시원하게 몰아내줬습니다.

이곳저곳 물을 주고 땡볕 아래 땀 흘리면서 하늘 원망했는 데, 당분간 물을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집 강아지 '삼월이''둘리'가 천둥소리에 화들짝 놀라 마루 위로 뛰어 올라와 좌우에 자리 잡고 누워서 나와 같이 비를 바라봅니다.

풀 죽어 있던 산과 들에 생기가 돕니다.

알맞게 내리는 비는 하늘에서 주신 선물입니다.

마당에 그늘 내리면 해야지 했던 일을 모두 뒤로 다 미뤄놓고, 오늘내일은 비를 핑계로 하루 종일 누워서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책 읽다가 잠자고, 자다가 일어나 책 읽고 빈둥빈둥거려 보려고요.

며칠 동안 구슬땀 흘리며 잡초와 씨름했으니 그럴 자격 충분하다고 나 자신에게 격려 한마디 했습니다.

'너는 그럴 자격 충분히 있어.'

알맞게 내린 비 덕분입니다.

보내주신 선물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9월 하순. 박영오 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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