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비소리가 내 마음을 흔들고 떠납니다 - 겸재 정선의 모우귀주(暮雨歸舟)

그림 이야기

by 더불어 숲 2017. 5. 7. 18:21

본문


금요일 저녁 모두 고향으로, 가족 곁으로 돌아갔는지 교원사택 8가구 전체에 인기척 하나 없습니다.

늦은 저녁, 간식거리를 사려고 마트에 다녀왔는데 내가 사는 402호 홀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제 라디오 일기예보에서 토요일 새벽부터 많은 비가 내린다고 하더니, 예보한 대로 이른 새벽부터 세찬 비가 내립니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잠결에 어둠속을 더듬거리며 시계를 봤더니 이제 겨우 새벽 2시 무렵입니다.

내리는 비가 빗소리를 앞세워 홀로 지새우는 나를 친구하자고 깨웠는가봅니다.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나버렸습니다.

 

비가 친구하자는데, 그 성의를 생각해서 옷을 두텁게 챙겨 입고 베란다로 나갔습니다.

늦은 밤 홀로 이 빗소리가 좋아서 교원사택 402호 베란다에 조저앉아서 밖을 바라다봅니다.

아직 불 밝힌 집이 없습니다.

오직 어둠속에서 멀리 교회 십자가 네온 불빛만 반짝입니다.

별다른 의미 없이, 깊은 어둠에 묻힌, 비 내리는 영덕읍내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예 의자를 베란다로 가지고 와, 전등을 모두 끄고, 어둠속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봅니다.

 

어둠속에서 듣는 빗소리가 오감을 모두 깨웁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배수구 홈통을 타고 내리는 물소리, 나무에 부딪히는 빗소리, 멀어졌다 다시 다가오는 빗소리가 어우러져 위대한 교향악 한곡을 만듭니다.

이른 새벽부터 잠을 설친 것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자이기에, 두런두런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기 보다는 홀로이기에 더 좋습니다.

이럴 땐, 피우지 못하는 담배이지만, 담배 생각이 간절합니다.

담배 한 개피가 참 맛있을 것 같습니다.

 

빗소리가 이렇게 좋은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늘 따라 어떤 음악보다 더 마음을 울립니다.

밀려왔다 사라지고 멀어지면 다시 하고 다가오는 빗소리를 어두운 창밖으로 보며 홀로 즐기고 있습니다.

수시로 변하는 간사한 인간의 마음처럼 이 봄비도 이내 지나가겠지요.

빗소리가 미처 지겹기도 전에 미리 제 알아서 사그라져 듭니다.

오늘은 이 밤을 다 지새우며 들을 수 있는데, 이 비가 지레 알아서 떠나가네요.

이왕 오는 비, 좀 더 내리지.......

 

사랑하는 그대 마음이 갑자기 내린 이 비처럼 그렇게 다가왔는데, 이 봄비가 그치면 비와 함께 왔던 당신이 같이 갈까 두렵습니다.

늦은 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혹시 당신도 토요일 이 새벽에 깨어있나요?

혹시 거기에도 비가 오나요?

비가 온다면 빗소리와 함께 내 마음도 거기에 머물고 있나요?

그립습니다.

당신이.......

      

( 201346일 토요일 새벽에 봄비가 내리다 )

    

 

 



정선의 모우귀주(暮雨歸舟)’ 그림입니다.

모우(暮雨)저녁 무렵에 내리는 비라는 뜻이고 귀주(歸舟)는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뜻일 테지요.

그림의 제목인 모우귀주(暮雨歸舟)’ 4글자에 작품의 설명이 모두 함축 되어있습니다.

굳이 그림을 설명 한다면.......

 

한가한 강촌에 저녁 무렵부터 촉촉이 비가 내립니다.

내린 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산자락을 덮고 있습니다.

잔잔한 물결로 봐서 바람 한 점 없는, 밥 짓는 저녁연기가 나지막이 밑으로 깔리는 차분하게 비 내리는 날씨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부가 도롱이를 쓰고 빗속을 재촉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애써 그림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저녁 밥상을 마련해두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겠지요.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걱정스레 몇 번이고 사립문 밖을 서성이는 아내의 모습이 나무그늘 뒤편 어디엔가 있을 듯합니다.

어부도 그런 아내가 염려되는지, 삿대를 물 밑바닥 모래에 깊숙이 꽂고 팔과 다리에 잔득 힘을 줘 배의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삿대와 어부의 몸 기울기의 각도를 보면 온몸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들어납니다.

 

어릴 적에 낙동강변에 있는 구담이라는 제법 큰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지금 경북도청이 새로 들어서는 곳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입니다.

강변에서 살아서 삿대로 나룻배를 건너 주는 사공들을 자주 봐왔기에, ‘모우귀주도의 어부의 모습을 보면 배의 진로 방향과 속도를 이내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비록 작은 그림이라서 어부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지만, 용을 쓰는 얼굴 표정과 경직된 팔과 다리근육, 아래 종아리의 정맥이 툭 불거진 모습까지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붓놀림 몇 번에, 저녁 무렵 안개에 쌓인 적막한 강촌 풍경과 비에 촉촉이 젖은 마을과 어부의 모습이 표현되었습니다.

애써 그림으로써 부연설명하지 않아도 겸재 정선의 표현의도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림에 붓질을 더하면 사족이 될 듯하고 덜하면 뭔가 부족할 듯합니다.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아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그림 한 점이, 이 봄에 내리는 비처럼 내 마음을 촉촉하게 젖게 합니다.

이 그림을 보고, 나 혼자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겠지요?

 

( 201346일 새벽에 쓴글을 다시 옮기다. 글 박영오 )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