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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장동 춘색도 - 이 봄에 피는 꽃이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림 이야기

by 더불어 숲 2017. 5. 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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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첫 월요일입니다.
지난 주말 퇴근길과는 달리 출근길 산천(山川)이 확연하게 달라져있습니다.
길섶에 이미 만발한 개나리와 매화꽃에 익숙해졌고, 숲 가장자리에 가득 피어있는 진달래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영덕으로 가는 길, 태백산맥을 넘으면 벚꽃이 만발합니다.
“까짓것 오늘 하루 지각하지 뭘” 자신에게 주문을 걸어 마음 독하게 먹고, 부러 천천히 운전을 하며, 하루하루 새롭게 달라지고 있는 산천을 여유 있게 바라보며 출근했습니다.

무채색 산야(山野)가 조금 조금씩 그 색을 달리하고 있는 이 계절이 유난히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버드나무 가지 끝의 연두색 새잎에 마음을 빼앗겨버렸습니다.
너무나 흔한 나무와 색깔인데 이렇게 마음이 가는 까닭은 아직 푸른색이 부족한 새봄이라서 그러하겠지요.
그 긴 겨울동안 푸름을 잉태한 채 숨죽여 있다가 드디어 이 봄에 찬란하게 꽃을 피운 진달래, 민들레, 제비꽃, 산수유 꽃, 벚꽃.......
그 어느 꽃이라도 소중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 봄에 피는 꽃 중에 아름답지 않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연녹색 푸른 새싹만 봐도 아름다운 것을......

무엇이든지 그 과정이 더 소중한데, 우리는 늘 습관적으로 결과만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그 흔한 진달래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 봄이면 당연하게 새잎을 여는 버드나무조차 긴 겨울의 고통이 왜 없었겠습니까?
여린 가지 끝에 매달린 꽃눈과 잎눈에 생명의 기운을 보낸, 꽃과 싹을 품고 긴 겨울동안 침묵하며 묵묵하게 참고 견딘 나무와 풀, 모든 생명에게 경의를 보내고 싶습니다.

식물이 그러한데, 사람살이는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요?
화려한 결과 뒤에는 수많은 실패와 노력이 있지 않았을까요?
한참 전에 피겨스케이트 세계 여왕으로 다시 등극한 김연아 선수 경기를 바라보며, 세계 1위의 영광 뒤에 숨어있는 그녀의 노력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 그 횟수를 어찌 손꼽아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고통을 익히 알고 있기에 시상대 위에서 흘린 그녀의 눈물에 나도 같이 눈물이 납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그러하겠지요.
첫눈에 반한 사랑이든지, 조금씩 다가간 사랑이든지, 그 사랑이 진실한 사랑이라면 숨어있는 그 과정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서로 마음 아파하며 서로 그리워한 시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과정이 힘들면 힘들수록 사랑은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겨울이 길고 추울수록 진달래가 더 붉게 피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화려하게 피운 봄꽃을 보며, 꽃 피우기 전까지 긴 겨울의 고통을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출근하는 나를 보며, “당신 언제 다시 안동 올 수 있어?” 합니다.
아이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후에 빈 집에 혼자 지내는 것이 힘들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마음 아파하며 갈등하는 이 순간을 꽃을 피우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시길.......


 


정선 장동춘색도



 겸재 정선의 ‘장동춘색’입니다.
그림으로 봐서 딱 이 계절이 아니면 한 두 주 더 지난 4월 하순 무렵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고, 꽃을 피우는 봄은 누구에게나 마음 설레게 하는 계절인가 봅니다.
춘정을 못이긴 선비들이 봄나들이 나왔습니다.
인왕산 기슭 장동 어딘가에 올라 한양의 봄을 만끽합니다.
 
그 시절 한양은, 제법 큼직한 세도가 기와집과 나지막한 초가집이 어우러져 집과 집이 이어지고, 곳곳에 숲이 가득한 전원도시입니다.
겸재 정선이 부러 강조하지 않았는데도 한양의 아름다운 봄 풍경이 화폭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굳이 이곳이 한양 어디쯤일까 추측해본다면, 장동이라는 지명과 멀리 보이는 산세와 성문(창의문)을 분석해 보면 지금의 어디쯤인가 가늠이 됩니다.
 
미리 먼저 온 선비들이 전망 좋은 산기슭에 앉아 춘색으로 가득한 한양을 여유 있게 내려다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조금 늦은 선비는 지팡이를 짚고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허겁지겁 올라오고 있습니다.
산 아래에서는 벙거지를 쓴 마부들이 주인들을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4월 하순, 5월 초순 이 무렵의 한양 풍경을 그린 '진경산수화'이지만 단원 김홍도에서 시작된 풍속화의 싹이 보이는 듯합니다.
 
집집마다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몇 그루는 꼭 심어놓고 사는 시절이라, 한양이라도 꽃이 가득합니다.
‘고향의 봄’이라는 동요의 노랫말처럼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그대로입니다.
다들 나지막한 집과 집들로 이어진 시절이기에, 한양 전체가 복숭아꽃 살구꽃 등등 봄꽃 속에 푹 파묻혀있습니다.
한창 물오른 버드나무가 연두색으로 물들어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봄꽃 보려고 굳이 경주 보문단지나 하동 쌍계사, 섬진강까지 갈일이 있나요.
때맞춰 한양 뒷산에만 올라가도 꽃 천지인 것을.......

나이가 들수록 봄에 돋아나는 꽃과 새싹이 더 신기해 보이고 자연을 바라보는 눈이 깊어짐을 느낍니다.
봄에 꽃피고 새싹 돋는 일이야 당연한 일인데 왜 신기해 보일까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아마, 선비들도 지금의 내 심정처럼 새롭게 돋아오는 새싹과 봄꽃을 바라보며 신기해하거나 감탄했겠지요.
 
겸재 정선이 왕성히 작업했던 1730-50년대의 조선시대 한양의 봄 풍경과 선비들의 일상을 그림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2013년 4월에 쓴 글을 다시 옮겼습니다.  글 박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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