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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그림은 조선 산천을 사진으로 담은 기록화입니다.

그림 이야기

by 더불어 숲 2017. 3. 19.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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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사진에 푹 빠져 산 적이 있었습니다.

풍경사진, 인물사진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촬영부터 하곤 했지요.

요즘은 디지털카메라가 대세라서 사진촬영을 취미로 가져도 큰돈이 들지 않는데, 그때는 제 수입의 많은 부분을 사진 필름 구매하고 인화하는데 거의 다 썼습니다.

틈틈이 용돈 모아서 카메라 장비 사고....... 다른 사람이 보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사진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아직도 가지고 싶은 카메라 렌즈가 있으니까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네요.

그렇다고 예술성이 뛰어나다거나 큰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사진으로 담는 그 작업이 그냥 좋았습니다.

오죽하면 우리집 아이들은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을까요.

아이들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찍어놓은 우리 가족사진이, 자식들에게는 나중에 소중한 재산이 되리라 믿습니다.

지금도 전에 만큼은 아니더라도, 눈길을 헤치고 이런 새벽 산을 오르거나 동해 일출을 사진 찍기 위해 밤새워 기다리거나 그런 열정은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사진 찍기를 좋아합니다.

비록 예술성은 없더라도, 자연이든 인물이든 현재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두는 작업은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또 하나 즐겨하는 일이 여행입니다.

중학교 때 생활기록부에 기록할 취미 특기 조사에서 여행이라고 썼더니 선생님이 여행은 무슨 여행이야, 언제 여행 다녀본 적이 있어?” 하고 물어보시더군요.

가난해서 3끼 밥도 제대로 못 먹던 시절, 여행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지만, 사진 한 장이나 지도 하나로, 마음속 상상으로 우리나라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여행 많이 다녔습니다.

 

요즘도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진 찍기와 여행은 찰떡궁합 아닙니까?

익숙하지 않는 환경, 새로운 풍경....... 이런 낯섬이 여전히 마음 설레게 합니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배낭 꾸리고 사진장비 챙겨 여행길을 나서면 소풍가는 어린아이처럼 설렙니다.

제 경제력으로 여행 다닐 수 있을 때가 되니 이젠 시간이 넉넉하지 못하네요.

내 차가 6년 조금 넘었는데 주행거리가 30km에 육박합니다.

그리고 지금 애마가 3번째 자동차입니다.

 

이런 제 개인적 취미생활이 이제는 한국화 작업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그림도구 챙겨서 스케치 여행 나갈 때 가장 마음 설렙니다.

사진촬영과 여행이란 취미에다가 한국화 하나를 더 얹었는데, 저에게는 요즘 말로 한국화가 ()”입니다.

 


막상 제 취미생활의 변화를 글로 옮겨놓고 보니까 자주 쉽게 변하고 있는 듯한데, 알고 보면 30년이란 긴 세월동안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일입니다.

 

옛 사람들은, 정선과 김홍도가 살았을 그 시대 사람들이 지금의 나처럼 사진, 여행, 그림에 취미를 가졌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괴나리봇짐에 화첩 하나 넣고 작은 붓과 벼루 준비해서 무작정 걸어서 명승고적을 찾아다녔겠지요.

신분 높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양반이라면 하인 한 명 부리며 나귀타고 다니지 않았을까요?

추측한대로 정선에서 비롯된 진경산수화 화가들은 우리 산천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화폭에 부지런히 담아 다행히 여러 작품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은 지금의 서울 주변 풍경(경교명승첩 京橋名勝帖)과 금강산 풍경을 여러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영남지방의 하양현감’ ‘청하현감으로 재직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경북지역의 산천풍경을 그림으로 많이 담았습니다.

정선이 우리 산천을 화폭에 담겠다는 그런 열정 덕분에, 발품을 팔아 우리 산천 곳곳을 그림으로 남겨, 사진이 없던 그 시절의 풍경을 정선의 그림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고 후세대들의 행복이라 생각됩니다.

정선의 작품 속에 남아있는 서울 근교의 풍경은 이미 대부분 사라져 아쉽지만 다른 지역의 풍경은 그나마 남아있어서, 지금의 자연산천과 정선의 그림 속의 풍경과 대조해보는 일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겸재 정선이 말년에 그린 안동의 도산서당풍경입니다.

천원지폐에 도안으로 사용되어 모든 국민이 알고 있는 계상정거도’는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터를 잡고 고요히 산다는 뜻입니다.

아직 도산서원의 전각이 다 들어서지 않은 도산서당과 주위 풍경을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

도산서당을 직접 방문하여 그림을 그렸는지 두 칸짜리 서당이, 왼쪽으로 나무에 가려 언 듯 보이는 마루가 지금의 도산서당과 꼭 닮았습니다.

그런데 도선서당 안에 퇴계선생님이 앉아 책을 읽고 있네요.

정선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 아니기에 당연히 상상으로 그려 넣었겠지만 마치 살아있는 퇴계선생님을 뵙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정선이 생존했던 시절에는 이미 여러 전각이 들어선 도산서원으로 자리잡았을 텐데, 도산서원의 전신인 단촐한 도산서당의 풍경을 굳이 그린 것은, 퇴계 이황선생의 친필 책을 얻게되자 그 기쁨으로 퇴계 선생이 살아생전에 도산서당에 계신 모습을 사실에 기초해 상상으로 그렸으리나 짐작됩니다.

 

그리고 낙동강이 도산서원 앞을 휘 돌아내려가는 강과 그 강을 끼고 함께 따라 내려가고 있는 나지막한 산 모습이 지금의 풍경과 변하지 않고 닮아있어, 그게 당연한 일인데도 신기합니다.

지금은 안동댐 호수물이 도산서원 턱밑까지 차오르지만, 안동댐이 없었다면 여전히 나룻배가 한가롭게 매여 있는 계상정거도와 같은 풍경이 아니었을까요?

 

그림의 왼쪽으로는 강을 끼고 안동에서 도산서당으로 오는 오솔길이 희미하게 보이지요?

안동댐이 생기기 전에는 신작로로 이용하기도 하고 아니면 옛 길을 따라 걸어서 도산서원에 오기도 했습니다.

오솔길을 따라 강을 끼고 하류로 가면 안동이고 상류는 발걸음을 옮기면 봉화 청량산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이 이 오솔길에 가득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왼쪽 위 끝의 멀리로 기와집이 한 채가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있는 집이, 아마 농암 이현보가 아버지를 위해 건축했다는 애일당이 아닐까 싶습니다.

 

 

겸재의 작품 중에 도산서원을 담은 부채그림이 한 점 더 있어 소개합니다.

위의 '계상정거도'가 퇴계선생이 살아생전(16C)에 후학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을 표현했다면, 아래 부채 그림은 정선이 활동했던(18C) 그 시대의 도산서원을 화폭에 담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도산서원의 건물배치와 거의 일치합니다.

겸재가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그림입니다.

정선의 그림은 당시의 모습을 지금의 사진처럼 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합니다.

 




201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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