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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은 역시 겸재 정선입니다

그림 이야기

by 더불어 숲 2017. 3. 19.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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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봄입니다.
대통령 이취임식 하듯이 굳이 몇 월 며칠부터는 봄이라고 선긋고 선언하지 않아도 봄은 오는군요.
겨울 내내 벗지 못했던 두툼한 점퍼가 무거워집니다.
계절이 변하면 봄이 오고 또 꽃이 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나이가 들수록 그 당연한 일이 참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도톰하게 살이 오른 버들강아지가, 언 땅을 비집고 뾰족뾰족 올라오는 이름 모르는 그 흔한 새싹이 신기해 이 계절에 길을 나서면 자주 발걸음이 멈춰집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유난히 추웠던 작년 겨울을 이겨내고도 뭐가 미안하고 부끄러운지 주춤거리고 자꾸 뒤로 숨는 흔한 잡초의 새싹들을 보면, 모든 것을 다해주고도 늘 미안해하는 꼭 우리네 아버지를 보는 듯합니다.
봄이라는 큰잔치에 자신은 주빈이 아니라는 듯, 봄의 대명사격인 매화, 벚꽃, 진달래 등 화려한 봄꽃들이 주빈으로 나타나 자신 앞에 서있어주길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듯해, 그래서 애틋한 눈길이 더 자주 갑니다.
“참 고생했다.”

사람 얼굴과 성격이 제각각 다르듯이 그림도 그린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전에는 잘 그렸다 못 그렸다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자로 남들 그림을 쟀는데 요즘은 ‘나하고 다르게 표현을 했구나’ 그렇게 바라봅니다.
각자의 그림이 각기 다른 모습과 개성을 지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각각의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아 재미있습니다.
누구의 인생이 더 중요하고 더 위대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삶과 인생이 자신에게는 최선이고 소중하듯이,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어느 누구든 존중 받아야하듯이 개개인이 그린 그림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지만 어느 한 순간에 변하지는 않습니다.
봄이 한순간에 오지 않듯이 말입니다.
흔한 풀꽃이라도 어찌 한순간에 짠하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겠습니까?
나름대로 오랜 시간 준비하고 기다리고 해서 그 연약한 풀꽃 한 송이를 피우는 것을.......
물이 끓는 온도가 100℃ 이지만 99℃까지 가열하고 기다려야 하듯이 봄도 어느 한순간에 오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합니다.
인간이 만든 것 중, 예술문화는 물이 흘러가듯이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른 속도로 변하여 갑니다.
그런다가 물이 99℃에서 100℃로 가열되어 드디어 끓듯이, 1℃의 차이에서 대변혁의 단계로 드디어 들어가듯이 문화도 그렇게 변합니다.

우리나라 옛 그림의 변화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중기까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은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땅에서 그렸는데 그림 속의 풍경은 중국 풍경입니다.
집도 옷도 중국풍으로, 동물도 중국 동물을 그려 넣지요.
그림의 주제도 대부분 중국 고사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조선 초기 그림 속의 소(牛)를 한번 살펴보세요.
소뿔이 뒤로 길게 제쳐진 남아시아의 물소와 닮아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초기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살펴보면 그림 속에 과장된 중국의 풍경이 담겨있습니다.


(안견, 몽유도원도)

 


뭐 이런 화풍을 비난하거나 낮게 평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요즘 우리의 의식주와 문화예술이 서양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그 당시 문화적으로 중국의 영향 아래에 있던 우리나라로서는 당연한 현상이니까요.

이런 화풍이 조선 중·후기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이런 중국의 화풍과 풍경에서 우리의 풍경으로 옮겨오는 첫 걸음을 디딘 분이 겸재 정선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림의 대상이, 소재와 풍경이 바뀌면 화풍도 자연히 따라 변하 것은 당연한 일이고, 우리의 산천을 처음 그림에 담기 시작한 이런 화풍을 진경산수화라는 것 또한 다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겸재가 태어나고 생몰 연대가 1676(숙종 2)1759(영조 35) 이니까 정선이 왕성하게 그림 활동 시기가 영조 재위 시절이겠군요.

영조다음 임금이 정조이고, 정조가 아끼던 화가가 김홍도였고 김홍도의 제자가 신윤복이었으니까, 정선-김홍도-신윤복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화맥의 흐름과 화풍의 정착과 변화가 한눈에 보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변화가 어찌 한 순간에 이뤄졌겠습니까?

꽃이 어찌 어느 순간에 하고 나타나겠습니까?

작은 씨앗에서 뿌리내리고 긴 겨울을 이겨내고 힘들게 싹을 틔워 비로소 이 봄에 꽃을 피우는 것을.......

겸재 정선에서 비롯된 우리 풍경을 담고 우리의 화풍으로 그려진 진경산수화도 오랜 세월과 보이지 않는 미미한 변화가 당연히 쌓여서 이루어졌겠지요.

그러나 다들 주저하고 중국의 화풍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 산천을 화폭에 옮겨 담은 그의 첫걸음은 위대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선은 99에서 100, 1의 차이로 조선시대 화단을 대변혁의 단계로 이끈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이 그림은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으로 손꼽는 인왕재색도입니다.

서울의 인왕산을, 한여름 한줄기 소낙비가 내린 후 숨어있던 폭포가 곳곳에 생기고 물기에 젖어 검게 번들거리는 화강암 암봉을 담대한 필체로 주저 없이 쓱쓱 그어 내리고, 암봉 아래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구름이 산능선을 타고 오르는데, 구름사이 사이로 방금내린 비를 촉촉이 머금은 숲이 언 듯 언 듯 보입니다.

정선은 인왕산을 다른 각도로 여러 번 그려, 인왕산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 만큼 인왕산을 그림소재로 좋아했다는 뜻일 테지요.

수 백 년이 지난 지금의 여름철 인왕산에 비가 내려도 이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인왕재색도작품의 크기가 80×140 정도라면, 화선지 전지 정도의 큰 그림인데, 이 작품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본다면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지요.

아직 작은 사진으로만 봐왔기에 인왕재색도를 볼 때마다 늘 아쉽습니다.

겸재 정선의 전시회가 열린다면, ‘인왕재색도가 전시된다면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꼭 가보고 싶습니다.

정선은 한양 주변을 화폭에 무척 많이 담았는데, 다른 풍경들은 거의 다 변하거나 사라지고 그 이름만 남아있는데 다행히 인왕산은 그 때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정선 작품. 장안연우)

 


정선의 그림 중에는, 작품을 볼 때 보다 지나고 나서 더 아련하게 가슴을 저미는 그림이 있어서 몇 번이고 돌아보게 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장안연우도입니다.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서울 장안을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가 내려다본 정경입니다.

차분히 내린 봄비 덕분에 장안 가득히 연무가 낮게 가라앉아있고 그 사이로 소나무 숲과 한양의 거리가 나지막이 내려다보입니다.

북악산 바로 아래 가까운 곳은 연이어 들어선 건물과 골목길을, 소나무와 잡목숲을 자세히 묘사하였지만 점점 멀어지면서 안개 속에 잠겨 아련하게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여 마치 꿈속에서 본 듯한 도시인 듯 환상적인 한양의 정경입니다.

도시 전체가 산과 숲으로 잠겨있습니다.

이 보다 더 아름다운 도시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숲과 안개에 잠긴 장안 뒤로 먼 산이 드리워져 있는데, 가운데 큰 산이 지금의 남산이고 그 뒤로 한강 건너 여러 연봉들이 병풍처럼 이어지는데 오른쪽 뾰족한 산이 지금의 서울대학교를 품고 있는 관악산인 듯합니다.

 



정선 작, 장안연월도

 

 

 

정선은 그곳에서 바라본 장안(한양)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는지, 보름달빛 속에 잠긴 장안연월도등 같은 지점에서 장안을 내려다보며 화폭에 담아서 여러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장안연우도'는 이슬비가 촉촉히 내린 다음 연무가 피어오른 장안의 풍경을 담았다면, '장안연월도'는 보름달빛에 어렴풋이 잠겨있는 아스라한 장안의 풍경을 몽상적으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화폭의 왼쪽 위로 보름달이 뜨고, 장안(한양)이 그 달빛 아래 은은하게 잠겨 숲과 먼 산이 실루엣처럼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저 달은 뜨는 달일까요? 아니면 지는 달일까요?

저도 자꾸 마음이 쓰입니다.

아무래도 지는 달일 듯합니다.

정선이 보름달빛에 취해 마당가를 서성이며 장안을 내려다 보다가, 방안에 들어가 뒤척이지만 쉽게 잠이들지 않아 다시 툇마루에 걸터 앉기를 반복하다가 모두들 잠든 새벽녘에 붓을 들지 않았을까요?  

달빛 속에는 가만히 만나고 있는 연인들의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 멀리 개짓는 소리만 가끔씩 들리는 공허함이, 돌아오지 않는 낭군님을 기다리며 새벽녘까지 삯바느질 하는 어느 여인네 호롱불빛만이 드문드문 보이는 쓸쓸함이 잔득 배여있는 그림입니다.

     

정선의 장안연우도나 연월도는 풍경을 담은 것이 아니라, 봄비 촉촉히 내리던는 날, 보름 달빛에 고요하게 잠긴 날, 그 풍경을 바라보던 그때의 정서 즉 그림을 그린 정선의 마음을 담아낸 작품이 아닐까요?  

저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당시의 풍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을 화폭에 담고 있는 정선의 마음이 보이는 듯 합니다.

정선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따라 내 마음도 함께 쓸쓸해집니다. 

이렇게 우리의 풍경을 우리 정서로 그림에 그대로 담아낸 화가가 그 이전에 그 누가 있었던가요?

그래서 다들 겸재 정선의 작품을 '진경산수화'라 칭하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겸재 정선은 역시 겸재 정선입니다.

 

또 하나, '장안연우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나라가 일본강점기 시절과 광복 후 근대화 과정 중에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듭니다.

그림 속에 사이사이 남아있는 나지막한 야산과 소나무 숲을 그대로 보호했다면, 불편하더라도 한양의 거리를 드물게라도 보존했다면, 흥인문 숭례문 등 사대문을 보존하고 문과 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그대로 보존했다면, 서울이 아마 세계적인 명승 도시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 봄비가 촉촉히 내리는 서울을 북악에서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요?

고층건물과 전신주가 엉킨 매연 가득한 도시 풍경이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도 새길을 내거나 도시를 건설할 때 여전히 갈등합니다.

문화재가 뭐 중요하냐, 동식물과 자연환경이 뭐 그리 중요하냐?

인간이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요.

그런데 정선이 바라보던 그 때의 풍경이 지금 서울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먼저 듭니다. 

 

우리,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보호할 것은 보호하고 보존할 것은 보존하며 살아가면 어떨까요?


2013.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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