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어느 길을 선택하든지 널 응원한다. (설악산 천불동 오련폭포)

산수화 화첩기행

by 더불어 숲 2017. 3. 22. 20:57

본문




설악산 천불동 오련폭포 - 박영오 2016년 작품




절기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더위가 심술을 부리는 무렵에, 대학생 딸아이와 단둘이 한라산을 다녀왔습니다.
한라산을 오르기에 가장 힘들다는 성판악 휴게소에서, 급하게 걸어도 왕복 10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등반길을 시작했습니다.
등산의 매력은 누구든 정직하게 자신의 발품을 팔아서 걸은 만큼만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곁을 빠르게 앞서지나가는 사람도, 이미 하산하는 사람도 그리 부럽지 않습니다.
그들도 이미 다 나와 같은 고통을 가졌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혹시나 싶어 이것저것 배낭 가득 챙겨온, 처음엔 그리 부담되지 않던 장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고갈되어가는 체력과 반비례해서 배낭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마침내 어깨를 묵직하게 짓누르더니 버거운 짐이 됩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와 닮아서 불필요한 것을 잔득 메고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적게라도 덜거나 나눠주면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굳이 나만 가지겠다고 욕심을 부려 인생의 무게를 더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참을 걸어올라, 숲을 빠져나와 수목 한계선을 지나고부터 비로소 우리 부녀가 힘들게 걸어온 길이, 한 뜸 한 뜸 바늘 하나로 누비옷을 만들 듯이 그렇게 걸어온 길이 눈 아래로 아련하게 내려다보입니다.
숲을 벗어나야 길이 내려다보이듯이 인생길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야 자신이 걸어온 길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이미 인생의 반환점을 한참지난 나이이기에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흐린 안개 속처럼 드문드문 내려다보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길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듯,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비바람 불고 안개가 시야를 흐려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딸아이와 별말 없이 마음속에 담긴 말들을, 정제된 간결한 상징적 언어로 선문답처럼 주고받으며 비바람 치는 한라산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르며, 길을 걷는 만큼 많은 생각도 오고갔습니다.
대학 생활의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둔 딸아이에게는 무수한 생각과 고민이 배낭의 무게만큼보다 더하게 어깨를 누르고 있겠지요.
굳이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이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해야할 아이의 고민이 마음과 마음으로 아프게 전해집니다.
“힘들지? 힘내, 곁에서 걷고 있는 저 사람들도 우리와 똑 같이 힘들게 걷고 있단다.” 아비는 뜬금없이 툭 던지듯이 말을 하고나서, 다시 한참 뜸을 들이고 느리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던 아빠는 널 믿어. 무슨 일을 하든지 피하거나 돌아가지 말고 지금처럼 당당하게 맞서라.”
“지금 비바람 치는 한라산을 오르는 것처럼 삶의 길도 여전히 힘들지만,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길이기에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자.”

아비의 언어도 정제된 문장이지만, 딸아이의 언어는 더욱 간결해 아비의 말에 한참을 침묵하다가 가끔씩 물기담긴 목소리로 짧게 “예” 대답할 뿐입니다.
땀이 촉촉하게 배여 있는 딸아이의 손을 슬며시 오랫동안 잡아주었습니다.


(딸아이가 대학 4학년 무렵 제주도 한라산 다녀온 글을 다시 옮겼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