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영원히 철들지 못하는 동물 (정선, 고사관폭도)

그림 이야기

by 더불어 숲 2017. 4. 4. 02:27

본문

영원히 철들지 못하는 동물이 하나 있는데, 그게 ‘남자’라고 합니다.


본래 ‘철이 든다’라는 말은 과거 전통사회에서 소한, 대한, 우수, 경칩 등 24절기를 훤히 알아서, 언제 씨 뿌려야 하고 어느 무렵 추수해야 하는지 농사철을 다 꾀고 있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 이치를 알아서 처신한다는 뜻일 테지요.
현실적으로 다시 말하면 꾀가 들어서 남의 눈치도 보고, 자신이 손해 볼 짓은 하지 않는 적당한 이기적 처신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당장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여자들 입장에서는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경제적인 문제가 눈앞의 현실인데, 그런 경제적 문제는 등한시 하고 이것저것 일만 저지르는 남자들을 보면 참 한심하게 여겨지고 영원히 철들지 못하는 인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요?
당연히 철이 덜든 인간입니다.
철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사춘기 소년처럼 아직 꿈을 꾸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나는 아직 경제적 손익이나 내가 처한 상황 등을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꿈꾸면 이루어질 것 같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그런 사람입니다.
나는 이 나이에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습니다.
40세가 넘기 전에 반드시 마라톤을 완주해보려고 꿈꿨고, 50세를 넘기기 전에 7번 국도 출발점에서 시작해서 바닷가를 따라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걸어 보려고 했습니다.
물론 2가지 모두 아직 시도조차 못했습니다.

요즘은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경치 좋은 곳에 황토 오두막을 짓고 싶습니다.
그림 좋아하시는 분들과 같이 그림 그리며 쉬었다가 갈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꿈이냐고, 지금이라도 당장 시작하면 되지 다들 그렇게 말하겠지요.
그런데 내 손으로 직접 기초적 설계와 건축, 완공까지 모든 과정을 내 손으로 직접해보고 싶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집을 들어설 장소입니다.
앞에는 맑은 개울이 흐르고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몇 걸음 옮기면 폭포가 바라다 보이는 산촌에 집을 짓고 싶습니다.
안동 길안 ‘만휴정’ 부근은 어떨까요?
그곳은 폭포는 훌륭한데 심산유곡이란 느낌이 들지 않아 망설여지고, 아니면 안동 길안천 대사리 부근은 어떨까요?
아참, 거기는 개울은 수려하게 좋은데 폭포가 없지........
영덕 옥계계곡 침수정 부근은 어떨까요?
거긴 안동에서 태어나 줄곧 생활해온 나에게는 심리적 거리가 있는 것 같고........
아무래도 경치 좋은 곳에 집짓고 사는 것은 그냥 꿈으로 머물고 말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듭니다.
이러니 아내가 ‘당신은 철이 들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하지요.
그래도 여전히 꿈꿉니다.
우리집에서 몇 걸음 옮겨, 노송 그늘 아래에서 폭포를 바라볼 수 있는 꿈을........


                                                                                                 겸재 정선 '고사관폭도'

 

정선의 '고사관폭 高士觀瀑' 입니다.
작품의 제목을 굳이 풀이 한다면, '지조 높은 선비가 폭포를 바라보다.' 이런 뜻일테지요.

한국화에서 나뭇잎을 그리는 방법, 개자점 소흔점 호초점 협엽점 등이 총동원된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철입니다.
폭포가 시원하게 굽이쳐 흘러내립니다.
인적이 없는, 물소리 새소리 오직 자연의 소리만 들리는 깊은 계곡에 앉아, 가야금을 타다가 폭포와 굽이쳐 흘러 내리는 계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네요.
그림을 굳이 분석하고 해석하지 않아도 그냥 느낌으로 전해집니다.

숲과 폭포, 계류, 스산한 바람소리, 적막함, 그 속에 홀로 앉아 있는 선비의 심정 등등이 말입니다.
옛 사람들은 시원스럽게 흐르는 계곡물과 폭포를 유난히 좋아한 듯합니다.
조선시대 회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폭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산수화에서 계곡과 폭포가 필수적인 것으로 봐서 물을 좋아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심성인 듯합니다.
부족한 저도 폭포와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면 절로 마음이 편안해 지는데, 자연 속에 살고 산수를 좋아했던 옛 사람들은 오죽했을까요?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 ’라고 하여 가장 으뜸 된 선(善)은 물처럼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곧 순리를 뜻합니다.
법(法)이라는 한자를 보면 (氵물)+(去 가다)=(法 법), 즉 법(法)은 물이 흘러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물이 제 스스로 길을 내며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 순리이고, 물이 흘러가는 길이 곧 법이겠지요.

서양 사람들은 물을 거슬러 올려놓은 분수를 광장이나 정원에 설치해 놓고 좋아하지요.
반면에 동양 사람들은 물이 흘러내리는 폭포를 좋아합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서양인과 자연에 순응 하고 묻혀 살고 싶어 하는 동양인들과의 차이점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네 조상들은 폭포가 있으면 폭포를 바라볼 수 있는 작은 정자 하나는 꼭 만들어 놓고 삽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절대법칙이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알려주는 도리이자 순리입니다.
나도 겸재 정선의 그림 속 주인공처럼 소나무 아래에서 폭포를 바라보며 유유자적 자연을 관조하며 여유롭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인격수양이 뭐 별다르겠습니까?
굽이쳐 흘러내리는 폭포를 바라보며 노자가 말한 가장 으뜸 된 선(善)은 물과 같이 사는 것임을 알아가는 것이 곧 인격수양이겠지요.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