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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그림 속의 '파초' (간절히 소망하면 얻게 되나요?)

그림 이야기

by 더불어 숲 2017. 3. 2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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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소망하면 언젠가는 이뤄지게 되나요?

오래전부터 ‘파초’를 꼭 키워보고 싶었습니다.
너른 마당가에 담장 키 높이보다 훨씬 높이 자라는 파초를 보면, 먼 남쪽 나라에서 옮겨온 식물답게 이국적 풍모가 물씬 풍기는 파초를 보면 저절로 눈길이 머물게 됩니다.
키가 훨씬한 이국적 외모의 청춘남녀를 보는 듯 합니다.

조선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파초를 즐겨 그렸습니다.
김홍도, 이재관 등등, 정조 임금도 파초도를 그렸습니다.
그 분들도 파초를 바라보는 마음이 지금 내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요.

파초 한 뿌리 구하고 얻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막상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아파트를 떠나지 못하기에, 심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주저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미끈한 줄기와 시원한 잎을 자랑하는 파초를 보면 늘 탐이 났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파초 한 그루 내 곁에 두고 키워야지 그 생각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부터 학교 현관에 파초를 화분에 담아서 몇 그루 키우더군요.
지난겨울 유난히 추웠지요.
그 겨울을 무사히 보내지 못해 파초가 냉해를 입어 검게 변하더니 결국 신학기 시작하기 전에 모두 밖에 버려졌습니다.
봄방학 중이지만 마침 학교에 근무하는 날이라서, 생명이 남아있을 듯한 파초 화분 두 개를 따뜻한 교무실로 옮겨놓았습니다.
우선 물부터 주고, 언 잎 잘라주고, 마치 환자를 돌보는 의사나 간호사처럼 그렇게 돌봤더니 생기가 돌아오고 새잎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요즘처럼 햇살 좋고 따뜻한 날이면 파초 화분을 밖에 들고나가 일광욕을 시켜줍니다.
추위가 온전히 가신 4월 중순 이후에는 학교 화단에 옮겨 심고 거름도 든든히 주려고 합니다.

파초 잎을 바라보면 비가 기다려집니다.
한동안 연잎에 비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면 연이 자라는 연못을 부러 찾았는데.......
파초 잎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궁금해집니다.
파초 잎이 많이 자라고, 나중에 비가 오면 부러 파초 곁에 서성거리며 그 빗소리를 들어보겠습니다.

파초 하나는 학교에서 키우고 있고 또 하나는 사택 베란다에 옮겼습니다.
거실 겸 안방으로 쓰고 있는 사택 방의 창문이 통유리로 되어있어 베란다와 밖을 훤히 볼 수 있습니다.
누워서 베란다에 있는 파초를 바라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합니다.
잎돋고 크게 자라면 인증샷으로 사진 올리겠습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사택에서, 출근해서는 학교에서 이제 겨우 자라기 시작한 키 작은 파초를 바라보며, 이 파초가 무슨 인연으로 나에게 왔을까?
내가 간절히 원했던 일이라, 하늘에서 키워보라고 선물로 준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소중한 인연이라 믿습니다.



김홍도의 '월하취생도'입니다.
'달빛 아래 술에 취해서 생황을 분다.' 뭐, 이런 뜻으로 제목을 붙인 것은 아닐까요?

김홍도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만큼은 남다른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저없이 시원시원하게 그어내린 옷 주름, 연녹색 담묵으로 툭툭 그린 파초잎, 물기가 채마르기 전에 잎맥을 그려 자연스런 번짐, 남자의 슬픈 얼굴 표정.......
주제 이외에는 그리 신경쓰지 않은 듯 표현해 시선을 자연스럽게 사나이와 파초잎에 머물게 합니다.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리며 치밀하게 계산해서 그린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그냥 자연스러움지요.

공자가 70세 성인의 경지에 이르니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내 마음 내키는대로 해도 도덕과 법에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했듯이, 김홍도 역시 붓가는 대로 그려도,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뒤에 제법 큼직한 술독과 큰 사발이 보이네요.
더위가 한창인 어느 여름밤, 파초 두서너 잎을 꺾어 잠뱅이를 걷어부치고, 아마 술독의 술을 혼자 다 비우고 보름 달빛을 등잔 삼아서, 파초잎을 깔고 앉아 파초잎에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린 모양입니다.
옛 사람들이 뭐 그리 바쁘겠습니까?
어차피 파초잎에 쓴 시와 그림은 시든 파초잎과 더불어 사라지는데.......
생황이나 내 심사처럼 구슬프게 불어나 보자.

그런데 그림 속 사나이의 눈동자를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보세요.
곧 눈물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슬픈 표정이 보이지 않나요?
달빛 부서지는 이 밤, 친구할 이 없어 홀로 술 한 독을 다 비우고 파초 잎에 그림 그리다 말고 생황을 부는 저 심정은 어떤 마음일까요?
얼마나 외롭고 슬프기에 눈동자에서 눈물이 곧 떨어질 듯할까요?
파초 잎을 깔고 앉아있다는 것은 현재 진행형을 뜻하는 것일테지요.
옆에 자신의 심정을 쓴 화제를 풀이하면, "월당의 처절한 소리 용울음보다 더 하네" 라는 뜻입니다.

이 그림은 다른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그린, 분명 김홍도의 자화상이라 생각됩니다.


201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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