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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로 밥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

한 줄 오두막 편지

by 더불어 숲 2023. 6. 26.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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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내외가 사는 아파트 거실 소박한 책장에는 군더더기 없이 당장 읽을 책 몇 권만 꽂혀있는데,  대부분 읽고 있는 시집(詩集)이 차지하고 있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것은 나와 닮았는데, 나의 책장에는 불교서적, 문화재, 여행, 그림 관련 서적이나 수필집이 마치 나의 독서량을  과장하듯 정리되지 않은 채 차지하고 있다.

아들 집에 가면 여러 시집을 찾아 골라 읽는 재미가 있다.

시는 정제된 언어들이다.

함축된 시어(詩語)를 읽으며 내가 생각해 왔던 감상을 어떻게 이렇게 맑고 투명한 언어로 압축할 수 있을까 존경심마저 든다.

소설이 경험과 머릿속 생각을 여러 문장으로 풀어쓴다면, 시는 여러 생각과 감상을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그래서 단 한 줄의 시를 오래 읽고 오래 생각하게 된다.

시 한 줄, 그 속에 수많은 속삭임과 긴 여운의 풍경이 담겨 있다.

그래서 아들이 시를 좋아하는 걸까?

굳이 풀어쓰고 여러 말로 설명하지 않고 정제된 언어로 몇 단어와 몇 문장으로 세상을 품고 마음을 담은 시집 속에서 한참을 걸어 다녔다.

얇은 시집 속에는 작가의 수많은 마음과 생각들이 압축된 언어로 숲을 이루고 있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산새 지저귐이 가득한 깊은 숲 속을 걷기도 하고 상처받은 아린 마음들을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시집 속을 걸어 다녔다.

마음을 풀어서 쉽게 쓴 시는 싱겁고, 지나치게 어려운 시어(詩語)로 겹겹 포장지로 꽁꽁 싸매어 놓은 시는 난이도가 높은 수학문제처럼 누군가의 설명이 필요한 듯해 두통이 따른다.

[박준] 그의 시가 좋다.

박준의 시 한 편을 옮겨 적는다.

 

당신의 연음

맥박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답장을 쓰다 말고

 

눅눅한 구들에 

불을 넣는다

 

겨울이 아니어도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는

밤이 이르고

 

덜 마른

느릅나무의 불길은

유난히 푸르다

 

그 불에 솥을 올려

물을 끓인다

 

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의 연음 같은 것들도

 

뚝뚝

뜯어 넣는다

 

나무를 더 넣지 않아도

여전히 연하고 무른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아들 집에서 박준 시집 속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박준 수필집 '계절 산문'을 다시 읽고 있다.

처음 읽는 것처럼 천천히 다시 읽고 있다.

그와 내가 살아온 세월이 서른 해 이상 차이가 있어도 그의 글과 시는 나의 마음을 가만히 두드리고 어루만져 준다.

박준, 그의 시어(詩語)처럼, 당신의 시와 수필로 밥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고 있다.

 
2023년 6월 26일 박영오 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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