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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 일기

한 줄 오두막 편지

by 더불어 숲 2023. 8. 1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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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창가로 햇살이 점점 길게 들어온다.

햇살의 깊이로 가을이 조금조금씩 다가옴을 알 수 있다.

아직은 왕성한 여름이지만 엊그제 저녁 무렵 서늘함이 바람 속에 묻어있었다.

덥다 덥다 해도 여름은 결국 간다.

더위를 못 참는 나에게는 계절의 순환이 그나마 다행이다.

아내는 가을이 오는 걸 두려워한다..

가을이 되면 쓸쓸해져서 싫다고 한다.

모두 내 책임인 듯해 괜히 미안해진다.

 

안면도 여행을 다녀오며, 아주 우연하게 간월암에 들렀다..

10여 년 전, 첫 간월암 여행을 하며 다시 올 수 있을까 했는데, 태안반도 돌아오며 도로 표지판에 '간월암' 이정표가 보인다.

아직 햇살이 제법 남아, '우리 간월암에 들렀다가 갈까?' 물어본다.

밀물이면 섬이 되는 바위섬에 오밀조밀 예쁘게 자리 잡은 작은 암자, 한 사람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대문을 일주문이라 이름하는 걸 보면 암자의 규모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더 예쁘다.

 

다행이다.

그때도 썰물이라 걸어 들어갔었는 데.

아내는 10년 전 그땐 제법 많이 걸어 들어간 듯한데, 지금은 몇 걸음 앞이라고 한다.

세월로 숙성된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다.

비좁은 간월암 마당에는 한여름 땡볕을 피해 갈 그늘 너른 팽나무가 잡스런 것들을 쫓아낼 듯, 두 주먹을 불끈 쥔 '금강역사'처럼 버티고 있다. 다행이다.

저마다 간절한 기원을 담은 기도문이 대웅전 마당 난간에 매달려 서해 바닷바람을 타고 흩날리고 있다.

 

아내가, 가을이 오는 듯하다고 시야 흐린 간월암 앞바다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더위에 지쳐 가을을 기다리는 남편과 서늘한 가을이 두려운 아내가 간월암 법당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한다.

바라는 계절은 서로 달라도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는 언제나 같다.

아내는 여름이 간다고 하고 나는 가을이 온다고 했다.

가는 계절에는 아쉬움이 배어 있고 오는 계절은 반가움이 묻어있다.

아내의 쓸쓸함은 아이들이 다 떠난 빈 둥지 증후군일까?

가을의 서늘함이 겹쳐 그런 걸까??

외로움은 사람으로 치유되고 고독감은 자기 내면적 치유로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아내는 가을이 되면 쓸쓸해진다고 한다.

가을을 기다리는 나도 가을을 앓았다.

아내의 쓸쓸함도 나의 계절병도 모두 내 탓인 듯하다.

계절병의 특효약 또한 계절, 춥다 춥다 하면서 봄을 기다리는 동안 슬며시 사라지는 병이라서 그래서 다행이다.

 

간월암에 달이 뜨면 참 예쁘겠다.

 

 

2023년 7월 중순, 박영오 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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