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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고생했다. 고맙다.

한 줄 오두막 편지

by 더불어 숲 2023. 12. 15.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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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나의 10년 된 자동차가 자꾸만 생명이 있는 생명체로 느껴지고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은 인격체처럼 느껴졌습니다.
애지중지하는 그런 것은 아닌데, 그저 실용적 기계일 뿐이라고, 크게 아껴주거나 닦아주며 애정을 기울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 녀석이 주행거리 30만 km를 넘기고부터는 애잔하고 나에게 무슨 말을 자꾸 건네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를 아껴주고 너는 나에게 의지해서 우리 한번 40만 km를 넘겨보자고, 여행 떠날 때면 다독여주며, "힘들지." "고맙다." 그렇게 말을 건네고 위로해 줬습니다.

지구 둘레가 약 4만 km라고 합니다.
10년 전에 소형자동차를 구입해 40만 km 조금 못 미치는 거리를, 지구를 거의 열 바퀴 돌아온 거리를 주행했습니다.
이래저래 잔고장은 더러 있었습니다만, 큰 고장 없이 우리 가족과 희로애락을 같이 했습니다.
요즘 들어 주행거리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고장이 잤아져 아쉽지만 새 차를 계약하고 이 아이를 떠나보내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자동차를 인수하기 며칠 전, 제법 먼 거리 여행을 다녀오던 중에 걱정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밤에, 비 내리는 고속도로에서 자동차가 멈췄습니다.
경고음이 들리고 전기장치가 모두 꺼져, 갓길에 급히 차를 멈췄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통 다들 자동차를 원망할 테지만, 나는 오히려 자동차에게 미안해지더군요.
'내 잘못이 크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어루만져주며 진심으로 위로해줬습니다.
도로공사와 보험회사에 연락하고 오래 기다려 겨우 견인해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차게 내리는 빗길 고속도로에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그 과정에, 알 수 없는 힘이 우리 가족을 지켜주고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10년을 함께하며 40만 km, 지구를 열 바퀴 돌아오는 거리를 같이 여행 다녔던 차를 떠나보냈습니다.
생명이 없는 기계이지만, 인격체처럼 가끔 말을 건네고 서로를 위로해 줬던 차를 떠나보내며 마음이 짠했습니다.
한참을 어루만져주고 "고생했다, 네 덕분에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하고 안전하게 다녔다. 고맙다." 그 말만 몇 번 되풀이했습니다.
"QM3. 27부 3897. 미안하다. 고생했다. 고맙다."

 

2023년 12월 15일. 박영오 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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