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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밤새 눈이 내렸어요

한 줄 오두막 편지

by 더불어 숲 2024. 2. 2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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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밤새 눈이 내렸어요."
이제 9개월 접어드는 손녀가 마치 눈이 내렸다고 알려주려는 듯이 아파트 거실 창문턱을 잡고 일어나 할아버지와 손녀만이 알 수 있는 외계어(옹알이)로 말해줍니다.
"그래, 눈이 밤새 내렸네....."
손녀를 번쩍 안아 들고 할아버지 눈높이에서 창밖을 보게 해 줬습니다.
손녀와 한참을 눈 내린 창밖을 내려다봤습니다.
눈길을 산책하는 사람들,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 번거로워하며 눈을 치우는 경비 아저씨, 눈을 가득이고 있는 나무들.... 할아버지 마음은 왠지 허전해오고 문득문득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오는데.... 품에 안긴 손녀의 따뜻한 체온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녹여 위로해 주는 듯합니다.
밤새 제법 많은 눈이 왔네......
어제 외손녀가 보고 싶어 아내와 딸네집에 왔는데 밤새 눈이 가득 내렸습니다.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창작과비평사, 1983년)

손녀를 안은 할아버지는 몇 개 알고 있는 시 중에 '사평역에서'를 낮은 목소리로 몇 구절 기억이 나지 않아 겨우겨우 읊조렸습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가장 막막했던 시절, 뭘 해서 이 삭막한 세상을 살아갈까, 미리 터 잡은 군대 친구를 어떻게 연락이 닿아 찾아갔습니다.
친구가 알려준 주소 하나로 겨우겨우 찾아갔는데 이미 막차 떠난 시간 눈마저 내려, 돌아갈 시간은 이미 지나 친구 하숙집에서 하룻밤 신세 지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답도 해답도 없는 신세한탄 반 미래 각오 반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더군요.
시골마을버스는 눈을 핑계로 오지 않아 걸어서 면소재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 나와 친구가 쥐어준 차비 몇 푼을 아껴 국밥 한 그릇 사 먹고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눈길 먼 거리를 돌아왔습니다.
거기도 여기도 눈이 가득 내려 걷고 차 타고 어렵게 어렵게 돌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래전에 보던 고교 영어 국어 등 참고서를 펼쳐 다시 책을 보는 일뿐.

꼭 안고 있는 가슴으로 전해지는 9개월 손녀의 따뜻한 체온과 올려다보며 웃어주는 천사 같은 미소가 할아버지 오래된 마음을 녹여서 위로해 줍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시는 그때 대송면인가 대소면인지 지명도 지역도 아득한 시골 버스 대합실에서 혹시나 버스가 안 오면 어떻게 하나 마음 졸이며 기약 없이 기다리던 내 마음속을 읽어본 것 같습니다.
눈이 밤새 내렸습니다.
손녀가 고사리 손으로 할아버지 얼굴을 만져줍니다.

 

 

2024년 2월 22일. 박영오 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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