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봅니다.

한 줄 오두막 편지

by 더불어 숲 2024. 5. 23. 00:02

본문

 

 

새벽 5시 무렵에 일어나 오두막 마당에 나섰습니다.

하지를 한 달 남짓 남겨둔 요즘은 새벽 5시 무렵이면 정원을 돌볼 수 있게 충분히 밝습니다.

습관적으로 호미 들고 잡초를 뽑고 어제 못한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려 합니다.

문득, 잠시 멈췄습니다.

이 찬란한 5월 하순의 꽃잔치를...... 오직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차려놓은 잔칫상인데, 꽃들 환영 인사도 미처 안 받고 호미질부터 하려 했구나..

멈칫멈칫 밝아지는 새벽녘, 생각도 같이 밝아집니다.

멈추고 조용히 바라봐야 깊게 속까지 보이는 것을, 오직 이 순간을 위해 긴 겨울을 이겨내고 찬란히 꽃 피운 너희를 그냥 지나칠 뻔했구나.

너희를 성가시게 하는 잡초를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꽃핀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너희인데.....

이 새벽 문득 깨닫게 됩니다.

호미를 내려놓고 새벽안갯속에 아직 잠이 덜 깼거나 아침 이슬에 젖어있는 여러 꽃들, 마치 선생님이 출석을 불러 확인하듯이 꽃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 봅니다.

노랑꽃창포. 낮달맞이꽃. 붓꽃. 우리 이름은 으아리 클레마티스. 꽃양귀비. 찔레꽃. 뒤늦게 핀 노랑작약꽃.... 그리고 여러 장미꽃이 어우러진 장미 울타리 앞에서 각각의 이름을 따로 불러줘야 하나 어쩌나 멈칫했습니다.

넌 안젤라 장미 넌 그냥 노랑장미라 하자 넌 뭐였더라? 그냥 모두 다 장미라고 하자, 장미.

하나하나 꽃을 챙기며 이름을 불러가며 눈 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 '' 하고 대답하는 건 아닐까요?

너 이름이 뭐였더라? 너는 등수국, 넌 석죽 패랭이. 한련화. 수레국화, 넌 금낭화였지, 꽃이 졌다고 그냥 지나칠 뻔했구나 미안.

너는 물 수()가 아닌 잠잘 수(睡) 자를(睡) 쓰는 수련(睡蓮)이지, 넌 이름값을 하는구나 아직 잠을 자며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수련마저 이름을 불러주고, 그래그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꽃 식구들에게 눈 맞춤을 하며 어루만져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밤잠을 설쳐 낮이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시건방을 떨지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평생을 알아가며 살아가는 미생인 것을.

일흔을 코앞에 두고 여전히, 그 당연한 일을 무슨 큰 자연의 법칙을 깨달은 것처럼 무릎을 치며 '아 그렇지' 하고 있습니다.

호미 슬며시 치워두고 그냥 아무 목적 없이 온전히 하루를 꽃들 너희와 보내련다.

너희와 서로 마주 바라보며 하나하나 이름을 다시 부르며 오늘 하루를 보내련다.

고맙다. 미안하다.

 

2024년 5월 하순. 박영오 글 사진.

'한 줄 오두막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큰 단어  (3) 2024.05.31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2) 2024.05.25
여전히 꽃이 피고  (3) 2024.05.18
둘째 딸 생일입니다.  (2) 2024.05.10
손녀 첫 돌입니다.  (3) 2024.05.06

관련글 더보기